1875년 9월, 일본 군함 한 척이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표면상 “식수 보급”을 위한 기항이라 했지만, 그 배후엔 치밀한 계획이 숨어있었어요.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충돌이 아니라, 조선을 강제 개항시키기 위해 일본이 기획한 함포외교의 결정판이었죠. 사건 전개부터 강화도 조약 체결까지, 왜곡된 보고서의 진실과 조선의 대응을 낱낱이 파헤칩니다.
시기와 배경: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야욕
운요호 사건은 1875년(고종 12년)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씨앗은 훨씬 이전,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된 일본은 대륙 침략의 첫 발판으로 조선을 노리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웠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같은 급진파는 즉각 조선 정벌을 주창했고, 이와쿠라·오쿠보 같은 온건파는 점진적 침략을 주장하며 맞섰죠.
국내 정치 변화도 중요했어요. 1873년 12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 친정이 시작되면서 민씨 척족 세력이 집권, 쇄국 정책이 다소 흔들렸습니다. 일본은 이를 조선 침략의 기회로 포착했어요. 부산 왜관 주재관 오쿠(奧義制)는 즉각 본국에 “대원군 실각으로 대한 교섭이 유리해졌다”고 보고했고, 일본 외무성은 모리야마 시게루(森山茂)를 부산에 파견해 조선 정세를 탐지했습니다.
| 시기 | 주요 사건 | 의미 |
|---|---|---|
| 1868년 | 일본 메이지 유신 | 근대화·대륙침략 시작 |
| 1873년 12월 | 흥선대원군 실각 | 쇄국 정책 이완 |
| 1875년 4월 | 모리야마, 포함외교 건의서 제출 | 운요호 파견 결정 |
| 1875년 5월 25일 | 운요호 부산 입항·무력시위 | 사전 정세 파악 |
| 1875년 9.20~9.22 | 운요호 사건 본 발생 | 강화도 침략·영종진 약탈 |
| 1876년 2월 26일 | 강화도 조약 체결 | 조선 강제 개항 |
1875년 4월 15일, 모리야마는 “조선은 내홍이 심하니 지금이 기회”라며 포함외교를 강력히 건의했습니다. 일본 외무성 데라시마는 이를 받아들여 해군성과 협의 끝에 군함 파견을 결정. “조선 해로 측량”이라는 구실을 내걸고 5월 초 운요호·제2정묘호 등 군함 2척을 부산에 파견합니다.
“연안측량을 빙자해 군함을 조선 근해에 출동, 위협함이 국면 타개의 최선책이다.” — 모리야마 시게루의 건의서
전개, 3일간의 침략과 약탈

9월 20일, 운요호(雲揚號·245톤)는 강화도 동남방 난지도에 정박했습니다. 함장 이노우에 요시카(井上良馨)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이 “식수 보급” 명목으로 보트에 나눠 타고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 하지만 이노우에가 훗날 밝힌 최초 보고서에는 목적이 달랐어요. “해안 측량 및 제반 탐색, 조선 관리 면회·탐문”이 진짜 이유였죠. 심지어 일본 국기도 게양하지 않은 상태로 강화도에 접근했습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 수비병은 정당방위로 침입 보트를 향해 포격을 가했어요. 당시 강화해협 입구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비석이 서있었는데, “외국 배의 통항을 금한다”는 뜻이에요. 병인양요·신미양요 이후 설치한 조선의 공식 경고였습니다. 그 경고를 무시하고 침입한 운요호에 대한 포격은 국제법상 완전한 정당방위였어요.
조선의 포격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 후, 즉각 초지진에 맹렬한 보복 포격을 가했습니다. 9월 21일엔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초지진을 재공격, 제2포대에 상륙해 불을 질렀어요. 그리고 22일 오전, 미리 눈여겨봐둔 영종진(永宗鎭)을 기습합니다. 22명의 일본군 수병이 영종도에 상륙작전을 펼쳐 조선 수비병 35명이 사망, 포로 16명을 납치했고, 대포 38문·화승총 130여 자루를 약탈한 뒤 공공건물과 민가를 불태웠습니다. 조선 측 사상자 대비 일본 측은 경상자 2명에 불과했어요. 근대식 무기 앞에 조선의 노후 병기는 속수무책이었죠.
| 날짜 | 사건 | 피해 |
|---|---|---|
| 9월 20일 | 국기 미게양 채로 초지진 침입→포격전 | 양측 사상자 없음 |
| 9월 21일 | 일본 국기 게양 후 초지진 재공격·방화 | 초지진 시설 파괴 |
| 9월 22일 | 영종진 기습 상륙·살육·약탈·방화 | 조선 35명 사망, 포로 16명, 대포 38문 약탈 |
| 9월 28일 | 운요호 나가사키 귀항 | 일본측 경상자 2명 |
날조된 보고서, 진실이 밝혀지다
9월 29일, 이노우에 함장은 나가사키 귀항 직후 최초 보고서를 작성했어요. 그런데 일본 해군성이 10월 8일 공개한 공식 보고서는 내용이 달랐습니다. 핵심 세 가지가 모두 날조됐어요. ①3일간의 교전을 9월 20일 하루로 축소, ②교전 시작 당시부터 일본 국기를 게양했다고 거짓 기술, ③강화도 접근 목적이 급수라고 위장. 이는 일본의 영해 침범이 국제법 위반임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죠.
2002년 일본 방위연구소 자료실에서 이노우에의 최초 보고서 원본이 발견되면서 날조 사실이 완전히 판명됐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날조의 배후엔 일본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 시게루와 훗날 조선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3일간의 영해 침범 전투를 하루로 축소하고, 급수 명목으로 포장한 날조된 보고서가 강화도 조약 협상 카드로 쓰였다.”
결과: 불평등 강화도 조약의 탄생
운요호 사건 직후 일본은 청에도 외교 사절을 보내며 외교적 해결을 시도했어요. 실패할 경우 조선 침공까지 계획했죠. 1876년 2월, 일본은 운요호를 포함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로 다시 들어와 함포외교로 조선을 압박했습니다. 조선은 국제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 관계를 맺기로 결정, 신헌(申憲)을 강화도로 파견해 일본 전권대사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와 협상했어요.
그 결과 1876년 2월 26일 체결된 것이 바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입니다. 총 12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조약은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에요.
| 조항 | 내용 | 의미 |
|---|---|---|
| 제1조 | 조선은 자주국, 일본과 평등한 권리 | 청의 종주권 부정 노림 |
| 제4~5조 | 부산·인천·원산 3개 항구 개항 | 경제 침략 교두보 |
| 제7조 | 일본의 조선 연안 측량권 인정 | 군사 작전 유리 |
| 제10조 | 일본인 범죄 시 일본 관원이 심판 | 치외법권(영사재판권) |
1876년 7월엔 강화도 조약에 이어 조일수호조규 부록과 무역장정이 추가 조인됩니다. 부록엔 일본 외교관 여행 자유, 거류민 거주지역 설정, 일본 화폐 유통 허용 등이 담겼어요. 일본의 경제적 침략 기반이 완성된 거죠.
역사적 의미: 조선 침략의 시발점
운요호 사건은 단순한 무력 충돌이 아닙니다. 일본이 치밀하게 기획한 포함외교의 결실이에요. 미국이 1853년 페리 제독의 함선으로 일본을 강제 개항시킨 방식을 그대로 모방해, 일본이 조선에 똑같이 적용한 것이죠. 한국 학계는 일본 정부가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일으킨 무력 도발로 봅니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식민지 침략의 시발점이 됐어요. 치외법권·무관세·연안 측량권은 이후 일제 강점기를 향한 발판을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운요호 사건에서 시작된 이 도미노가 1910년 한일 병합으로 귀결됐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아요.
“운요호가 초지진을 향해 포문을 연 그 순간, 조선 500년 사직의 운명이 기울기 시작했다.”
운요호 사건 핵심 정리: 1875.9.20~22 강화도 침략 → 영종진 약탈 → 날조된 보고서 작성 → 1876.2 강화도 조약 불평등 체결 → 조선 식민지화 시발점. 일본의 기획된 도발이었음이 2002년 원본 보고서로 확인됐습니다.



![[최신 자료] 국가유공자 치매혜택 완벽 가이드, 진료비 지원부터 요양병원까지](https://meaade.com/wp-content/uploads/2026/02/최신-자료-국가유공자-치매혜택-완벽-가이드-진료비-지원부터-요양병원까지-150x150-optimized.pn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