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된 SBS 대하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를 기억하시나요? 유아인, 김명민, 천호진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여말선초 조선 건국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초반부터 계속 등장하면서 극의 전개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재가 있었으니, 바로 안변책입니다. 도대체 안변책이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많은 등장인물들이 목숨을 걸고 통과시키려 했을까요?
안변책이란 무엇인가
안변책은 한자로 풀이하자면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용어는 당시에 사용된 이름이 아니라 훗날 역사학자들이 붙인 명칭으로, 현재 정치권에서도 종종 변방이나 특정 지역을 안정시킬 대책을 논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1383년 8월, 동북면 도지휘사였던 이성계가 호바투와의 전투를 마친 후 우왕에게 올린 상소문이 바로 안변책의 실체입니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에는 이성계가 1382년 동북면 일대를 휘저으며 노략질하던 여진을 궤멸시켰고, 이듬해 변방을 안정시킬 계책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변책의 주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는 평시에도 백성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외적의 침략에 대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여진족과 원나라 잔존 세력의 침입이 잦았던 동북면 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현실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둘째는 관할 지역에서 거둔 세금으로 군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이 시사하는 바는 명확했습니다. 만약 조정에서 안변책을 승인하면 이성계는 군사권과 행정권을 독립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됩니다. 중앙 정부의 간섭 없이 군대를 훈련시키고, 세금을 거둬 자체적으로 군량을 확보하며, 독자적인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드라마 속 안변책과 역사적 사실의 차이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정도전이 안변책을 작성해 이성계에게 건네주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정도전은 이성계와의 첫 만남에서 그의 덕장으로서의 면모를 파악한 후 안변책을 선물로 남기며 떠납니다. 이후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 몰래 그의 도장을 훔쳐 안변책에 날인하고, 이를 정도전에게 전달하면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다릅니다. 기록상 안변책은 이성계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이 확실합니다. 정도전이 이성계를 처음 만난 시기는 1383년 가을이고, 안변책이 올려진 시기는 그보다 앞선 1383년 8월입니다. 시간적으로 정도전이 안변책을 작성했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함흥을 중심으로 동북면 일대를 지배하는 대영주로서 최소 수천 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군무와 행정 업무 일선에서 보낸 그가 이런 상소문 하나 작성할 식견이 없었다고 보는 것은 무장을 바보로 보는 시각일 뿐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이방원이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안변책에 날인하는 장면이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실제로 누가 도장을 찍었는지, 이방원이 개입했는지는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드라마는 이방원의 야심과 정치적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이러한 설정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안변책이 가진 정치적 의미
고려 조정 입장에서 안변책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사실상 이성계에게 자치권을 주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군사력을 키울 수 있는 권한을 주는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이 안변책을 수용한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동북면의 안정이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동북면이 무너지면 곧바로 개경까지 외적의 침입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여진족과 원나라 잔존 세력의 위협은 실질적이었고, 이를 막아낼 수 있는 인물은 이성계밖에 없었습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안변책이 통과되는 과정이 매우 극적으로 그려집니다. 이인겸과 홍인방 같은 권문세족들이 강력히 반대하고, 정도전이 그들의 욕심과 불안을 교묘하게 이용해 도당을 통과시키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2015년 방송 당시 시청자들은 안변책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드라마 공식 페이스북에 문의를 쏟아냈고, 제작진은 삼봉이의 대모험이라는 제목의 콘텐츠로 안변책 통과 과정을 동화 형식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안변책과 가별초의 관계
안변책이 조선 건국에서 갖는 진짜 의미는 경제적 기반 확보에 있습니다. 이성계 가문은 가별초라는 강력한 사병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가별초는 가문의 정병이라는 뜻으로, 대략 2천명에서 3천명 규모의 전투 병력이었습니다.
당시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의민도 1천명 정도의 사병을 거느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별초는 엄청난 규모의 무력이었습니다. 전투 병력만 최소 2천명이라는 것은 보급과 지원 인력까지 합치면 그 규모가 훨씬 더 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이런 대규모 군대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군사들에게 매일 밥을 먹여야 하고, 무기와 갑옷을 정비해야 하며, 훈련에 필요한 각종 물자를 조달해야 합니다. 안변책이 승인되면서 이성계는 관할 지역의 세금으로 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래 이성계의 선조들은 원 간섭기에 목조 이안사를 따라 전주에서 삼척으로, 다시 삼척에서 동북면 의주로 이주하면서 가호의 후손들로 가별초를 꾸렸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이 무력 집단이 안변책으로 경제적 토대를 갖추면서 더욱 강력해진 것입니다.
실제로 안변책이 수용된 이후 이성계는 가별초를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후일 위화도 회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성계의 군사력이 다른 고려의 군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진 것은 바로 안변책을 통해 확보한 경제적 기반 덕분이었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운명적 만남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는 부분입니다. 유배 생활을 전전하며 고려의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정도전은 결단을 내립니다.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진 인물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정도전은 정몽주로부터 이성계의 명성을 전해 듣고 1383년 가을 함길도 함흥으로 직접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정도전은 이성계 휘하 군대의 일사불란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군사들이 군령을 엄격히 지키고, 무기가 잘 정비되어 있으며, 훈련에 열심히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정도의 군대라면 큰 일을 해낼 수 있겠다고 확신했습니다.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이성계를 처음 만난 후 이 정도 군대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전쟁터를 누벼온 이성계가 정도전의 진짜 뜻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는 무슨 뜻이냐며 모르는 척했습니다. 정도전은 표면적으로는 왜구를 소탕하는 일이라고 둘러댔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이면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날 정도전은 군영 앞에 서 있는 오래된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그 위에 시 한 수를 남겼습니다. 그 시에서 정도전은 이성계를 늙은 소나무에 비유하면서, 때가 되면 천명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러 나서야 한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은근히 드러냈습니다.
이성계 역시 정도전의 학문과 국가 경영에 대한 식견에 감탄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사람은 무력을, 다른 한 사람은 지략을 갖춘 완벽한 조합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밖에 없다고 결론 지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했습니다.
드라마 속 안변책 통과 과정의 긴장감
육룡이 나르샤 9회와 10회는 안변책이 도당에서 가결되는 과정을 매우 박진감 넘치게 그려냅니다. 정도전의 교묘하고도 기막힌 심리전이 더해진 이 에피소드는 한 편의 짜릿한 정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쾌감을 선사했습니다.
이미 백성의 것을 잔뜩 빼앗고도 모자라 더 많은 것으로 배를 채우려는 권문세족 일당이 모여 있는 도당. 그 장소와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물 정도전이 거꾸로 그들의 욕심과 불안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홍인방과 길태미의 불안한 심리를 역이용하며 권력 싸움에 불을 붙인 정도전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믿었던 길태미에게 뒤통수를 맞은 이인겸이 분노에 치를 떨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청년 이방원이 짜릿한 기쁨을 느끼는 장면까지, 수많은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가 교차하며 긴장감을 극대화했습니다.
드라마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안변책에 도장 찍기를 거부하자, 몰래 그의 인장을 가져다 직접 날인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방원은 홍인방과 밀거래를 했다는 혐의로 순군부에 끌려가 국문을 받게 됩니다. 남꼴통이라는 별명의 강직한 순군부 부만호 남은이 직접 조사를 맡을 정도로 사건이 커집니다.
하지만 정도전의 치밀한 계략으로 약산이라는 도적이 조작된 밀서를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성계는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인겸은 정도전에게 또다시 역관광을 당하며 수모를 겪게 됩니다.
안변책 이후 이성계의 선택
안변책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크게 분노합니다. 아들 이방원을 잡아들이라 명하고, 안변책을 철회한다는 장계를 올리려 합니다. 드라마 속 이성계는 매우 복잡한 심리를 보여줍니다. 자신이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는 이상 하지 않는다는 원칙론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호발도가 침공해 왔다는 전령을 받고 상황이 급변합니다. 전투를 앞두고 이방우가 개경에서 달려와 이방원이 이인겸에 의해 순군부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이성계가 안변책 통과를 위해 홍인방과 밀거래를 했고, 그 중계를 이방원이 맡았다는 혐의였습니다.
이방우는 이인겸이 먼저 싸움을 걸어왔으니 전주 이씨 가문이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며 이방원을 구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성계는 수긍한 뒤 호발도와의 최종 전투에 나서고, 승리를 거둔 후 단신으로 개경에 들어갑니다.
도당 회의에서 이성계를 추포하여 조사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정몽주의 도움으로 도당에 들어간 이성계는 모든 혐의가 조작되었음을 밝혀냅니다. 이후 안변책의 일로 무릎을 꿇은 이방원을 보며 이성계는 중요한 결심을 합니다. 아들의 손을 잡으며 앞으로는 절대로 권력에 무릎 꿇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겠다고 맹세합니다.
어린 이방원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가 권력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며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이방원이 권력의 본질을 깨닫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 결심하게 만드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안변책이 조선 건국에 미친 영향
결과적으로 안변책의 승인은 조선 건국의 첫 단추였습니다. 이성계는 무력으로는 가별초를, 지략으로는 정도전과 조준 같은 신진사대부를, 경제적으로는 안변책을 통해 조선 개창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안변책으로 확보한 경제적 기반은 가별초의 위력을 더욱 크게 만들었습니다. 이후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면서 이성계의 군사력은 다른 고려의 군벌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해졌습니다. 여기에 정도전, 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가 합류하면서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동력을 완전히 갖추게 됩니다.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 제목은 용비어천가의 1장 첫 구절인 해동 육룡이 나르샤에서 따온 것입니다. 여섯 마리의 용이 날았다는 뜻으로, 드라마에서는 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이방지, 분이, 무휼 6명의 인물을 육룡으로 설정했습니다. 이 중 세 명은 실존 인물이고, 세 명은 가상 인물입니다.
원래 용비어천가에서 말하는 육룡은 이성계의 고조부터 태종까지 여섯 대의 선조를 의미합니다. 목조 이안사, 익조 이행리, 도조 이춘, 환조 이자춘,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드라마는 이를 변형하여 조선 건국에 참여한 여섯 명의 인물로 재해석했습니다.
드라마가 주는 교훈
육룡이 나르샤는 단순한 역사 드라마가 아닙니다. 권력과 정의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힘을 가진 후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질문합니다.
김영현 작가는 기획 의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의와 원칙을 지키려면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힘을 가지면 불의해지기 쉽다. 이 딜레마를 육룡이라는 여섯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안변책은 바로 이 딜레마의 시작점입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때로는 편법도 불사해야 합니다. 이방원이 아버지의 도장을 훔쳐 안변책에 날인한 것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없었다면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도 시작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드라마는 50부작으로 제작되어 2015년 10월 5일부터 2016년 3월 22일까지 방송되었습니다. 종영 후 제43회 한국방송대상 장편드라마부문 작품상과 제11회 서울드라마어워즈 장편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특히 안변책 통과 과정을 그린 초반부 에피소드들은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복잡한 권력 구도 속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들, 그들의 욕망과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정도전의 지략, 그리고 모든 것을 지켜보며 성장하는 이방원의 모습까지, 촘촘하고 탄탄한 스토리 구성이 돋보였습니다.
안변책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권력의 본질과 정치의 현실을 보여주는 상징적 소재였습니다. 변방을 안정시킨다는 명분 아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안변책의 진짜 의미였습니다. 육룡이 나르샤는 이 복잡한 정치적 계산을 드라마틱하게 풀어내며 시청자들에게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했습니다.






